술 상식 정보 / / 2026. 10. 1. 18:09

어머니가 꺼내주신 술에 과거 시험 날짜를 놓친 선비 이야기

지난 주말 본가에 내려갔더니, 어머니가 냉장고에서 낯선 병을 하나 꺼내셨습니다. 투명한 유리병에 붓글씨로 적힌 '소곡주'라는 이름. 친척 한 분이 충남 서천에 다녀오시면서 사다 주셨다고 하는데, 1800ml짜리 큰 병을 보고 "이걸 둘이서 다 마시라는 거예요?" 하고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.

저녁상에 배추전을 부치는 냄새가 났고, 어머니는 작은 유리잔 두 개를 꺼내 술을 따르셨습니다. 색은 맑았는데 따를 때 느낌이 청주보다 묵직했습니다. 한 입 마셔보니 생각보다 달았습니다. 식혜나 단술 비슷한 단맛이 먼저 오고, 그 뒤에 누룩 특유의 구수한 향이 입안에 남았습니다. "어, 이거 도수 약한가 봐요?" 하고 제가 묻자 어머니가 웃으며 라벨을 가리키셨습니다. 16도. 와인보다도 높은 수치였습니다.

 

한산 소곡주

 

달다고 몇 잔 더 마셨다가 벌어진 일

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. 단맛이 강하니 술이 아니라 음료처럼 느껴져서, 저는 별 생각 없이 두 잔, 세 잔을 더 따라 마셨습니다. 평소 소주나 맥주를 마실 때처럼 속도 조절을 전혀 하지 않았던 거죠. 그런데 네 잔쯔음을 넘기자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,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습니다. 분명 "약하다"고 생각했던 술인데, 취기가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묵직하게 올라왔던 겁니다.

 

그 모습을 보시던 어머니가 "너도 똑같구나" 하시며 들려주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. 옛날에 한양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가던 선비가 한산을 지나다가 이 술을 한 잔 얻어 마셨는데, 맛이 너무 좋아 계속 마시다 보니 그만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취해버려서 결국 시험 날짜를 놓쳤다는 전설입니다. 그래서 이 술에는 '앉은뱅이 술'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요. 저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, "이게 진짜 전설이 아니라 사용 설명서였구나" 싶었습니다.

소곡주라는 이름, 그리고 왜 냉장고에 있었는지

나중에 궁금해서 찾아보니, 한산소곡주는 백제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왔다고 전해지는 술로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에서만 전통 방식으로 빚어졌다고 합니다. '소곡주(小麯酒)'라는 이름도 누룩을 적게 써서 빚는 방식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있었고요. 어머니가 왜 상온이 아니라 냉장고에 보관하고 계셨는지도 그제야 이해가 됐습니다. 라벨에 적힌 '생주(生酒)'라는 표기는 열처리로 살균하지 않은, 발효가 아직 살아있는 술이라는 뜻이었습니다. 그래서 상온에 두면 안 되고, 유통기한도 길지 않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.

 

그러고 보니 막걸리와는 확실히 다른 술이었습니다. 막걸리는 탁하고 신맛이 도는 편인데, 소곡주는 맑고 걸쭉하면서 신맛보다 단맛이 훨씬 강했습니다. 도수도 막걸리의 두 배 이상이라, 겉모습만 보고 가볍게 접근하면 저처럼 당하기 쉬운 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. 참고로 가격도 궁금해서 찾아보니, 1800ml 한 병 기준으로 보통 2만 원대 초중반이면 구할 수 있었습니다.

다음엔 배추전이 아니라 수육이었다면

그날은 배추전과 함께 마셨는데, 기름진 전 요리와의 조합이 꽤 좋았습니다. 누룩향과 단맛이 느끼함을 잡아주는 느낌이었어요. 다음엔 좀 더 기름진 안주, 예를 들면 수육이나 보쌈 같은 것과 곁들여보면 어떨지 궁금해졌습니다. 다만 확실한 건, 다음에 다시 이 술을 마신다면 절대 "약하다"는 느낌에 속지 않고 천천히, 중간에 물도 한 잔씩 끼워 마실 생각입니다.

 

어머니는 다 드시고 나서 "이게 옛날엔 선물로도 많이 주고받았다"며, 전통식품명인이 직접 빚은 제품은 차례상에도 올린다고 하셨습니다. 저는 그날 처음 마셔본 술 하나로 선비의 전설, 도수의 함정, 그리고 본가에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까지 한꺼번에 얻어온 셈이었습니다.

※ 음주는 만 19세 이상 성인만 가능하며, 지나친 음주는 건강을 해칩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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